강 위를 거닐고 싶었습니다. 마치 속계를 떠난 신선처럼…. 그 바람을 안고 진주 충무공동 한림 풀에버 아파트 앞 바람모아 공원에서 걸었습니다. 공원에 내린 가을빛을 구경하면서 남강을 따라 상평교까지 느릿느릿 시간 사치를 맘껏 누리며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늘을 담은 푸른 남강 덕분에 마음마저 덩달아 푸르게 푸르게 물들었습니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남강이 진주성을 에둘러 돌아 여기에서 저와 함께합니다. 등 뒤로 달을 토해 놓는 듯한 부드러운 달음산(월아산⸱月牙山)이 동행합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진주성 1
지난 10월 8일자로 지리산 둘레길이 세계 최장(295.1Km) 들꽃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계 최대, 최초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느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던 우리나라의 여러 사례들이 떠올라 걱정과 우려의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론 지리산 둘레길이 산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걷는 길섶에서도 숱한 들꽃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에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이번 초록걸음은 가을 들꽃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걷기로 했다. 이번 초록걸음의 출발지 단속사지는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한창
주말에 남해의 한 사찰에서 1박 2일 템플스테이를 했다. 중간고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중3 아들에게 약간의 쉼표를 주고 싶었다. 갱년기에 접어든 부부와 16살 사춘기 아들과 천진난만 10살 딸아이. 우리에게 배정된 방에는 이불과 베개가 4개씩, 그리고 지난 여름 부지런히 공덕을 쌓았을 선풍기 1대가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TV가 없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템플스테이라면 이 정도 부재는 기본이지. 도착했을 때 스님이 일정표를 보여주시면서 되도록 묵언수행을 시도해보라고 하셨다. 사실 그 미션은 식은 죽 먹기였
가을이 익어갑니다. 가을이 뿌린 가을빛은 두 눈 가득 안고 가슴속 깊은 곳으로 들어와 물들입니다. 요즘 진주 남강에 가을이 내려왔습니다.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드라마 페스티벌이 강낭콩보다 더 붉게 남강을 물들입니다. 10월 5일과 6일 저녁에 가을이 내려앉은 현장을 찾았습니다. 먼저 5일 날은 진주공설운동장 주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명절 고향을 찾는 이들처럼 주위는 사람이 물고기 떼처럼 움직입니다. 천수교 아래 공룡을 주제로 한 등들이 음악분수대의 화려한 물줄기 사이로 모습을
이른 새벽, 잠을 깨니 빗소리가 들린다. 서늘해진 공기, 마당에 내려서니 빗방울이 무겁고 차갑다. 손전등을 켜고 뒷마당으로 가 한뎃잠을 자는 닭을 닭장 안으로 들였다. 비를 맞으면 저체온으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지난 여름 알 수 없을 동물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닭들이 물려 죽었는데 그날 이후 살아남은 닭들은 집에 들어가기를 꺼려 뒷마당 장작더미 위에서 한뎃잠을 잤다.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사방은 적막하고, 골목 가로등 불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자마자 빠르게 어둠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보였다. 따지
단어만 떠올려도 설레는 게 소풍입니다. 소풍 전날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잠든 추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설레게 하는 소풍에 관한 이야기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호주 매씨 가족의 경남 소풍 이야기’ 특별전이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립니다. 호주 선교사 맥켄지 가족이 찍은 사진이 주를 이루는 특별전은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경남과 부산지역에 머물며 한센인과 임산부, 백정,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의술과 교육을 펼친 이들 가족의 기록입니다. 2016년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에서 열린
태풍 타파가 북상한다는 소식에 초록걸음을 신청했던 길동무들의 참가 취소가 속출했지만 그래도 초록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단촐한 길동무들은 지리산 동쪽 끝자락 웅석봉 산행이 시작되는 지곡사에 모여 걸음을 시작했다. 비옷을 챙겨 입은 모습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꽃송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비 내리는 날 둘레길을 걷는 길동무들의 뒷모습은 시작부터 더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지곡사에서 수액 채취를 위해 설치된 고무호스가 지금까지도 방치되어 있는 고로쇠나무 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어 도착
여든을 넘긴 김씨의 눈언저리가 축축이 젖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잘 익은 포도알갱이 몇 알을 손에 쥐어줄 때였다. 병상 침대걸이 탁자엔 우리가 가져간 요구르트와 바나나와 삶은 달걀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빨대를 꽂아 요구르트를 입에 물릴 때도, 바나나를 까서 손에 쥐어줄 때도, 삶은 달걀을 까 소금에 찍어 건네줄 때도 무덤덤해하던 김씨였다.“영감 줄라고 아침에 마당가 포도나무에서 따 왔지.” 그의 아내가 건넨 그 포도 몇 알에 김씨는 마침내 울음보를 터뜨렸다. 함께 지켜보던 교회 앞 성샌이 고개를 돌리며 돌아서고, 평상 팔걸이를 잡
두루마기에 중절모까지 쓰시고 아침 일찍 나서시는 할아버지를 향해 할머니는 자주 이렇게 툭 던지셨다. “할일 없는 장에 볼 일 없이 뭐하러 가요?'” 내가 장마실에 참여한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어느덧 조금은 기다려지고 설레기도 하는 자그마한 즐거움이 되어버린 장마실, 전통장날 기행...이번 달은 함안 가야읍장이다. 일요일 아침, 이부자리에서 뒹굴며 리모콘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호사를 마다하고 모인 회원들은 소풍가는 아이들 마냥 다들 즐거워 보였다. 함안까지 가는 사십 여분, 다들 웃음거리를 풀어놓으며 시간 가는 줄 모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국 대전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상실감의 과정을 거쳐 이제 각성의 단계에 이르렀다. 마치 높은 성(城) 안을 들여다본 느낌. 눈이 번쩍 뜨였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기득권의 성채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왔는지, 역동적인 스토리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 이상이었고 스케일 또한 만리장성을 능가했다.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니까. 인정하면서도 굳이 찾아낸, 그들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은 본능에 충실하다는 점이었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던 좌파 지식인. 학벌과 집안배경, 독재에 저항한 소신, 심지어 외모까지 너무 완벽
방앗간 아주머니는 우리 고춧가루에서 단내가 난다고 했다. 잘 말라서 색깔도 곱다고 했다. 고추가 바뀔까봐 기계에 바짝 붙어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눈이 따갑고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났다. 백 근을 빻았다. 단내가 나고 색깔도 곱다는 고춧가루를 앞에 놓고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끔 고추밭을 둘러볼 때는 속상하고 부아가 났다. 고추가 익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찾아가서 살펴봐야할 고추밭이었건만 고추밭은 가기를 꺼렸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분무기 빌려 두 번 농약이라는 것을 뿌린 탓이었다.“고추에 탄저병이 생기는데......” 몇
문을 열면 가을이 와락 안기는 요즘입니다. 어디로든 가야 할 듯 가을은 우리의 등을 떠밉니다. 여름을 건강하게 보낸 나 자신을 위해 조금 느려도 괜찮은 시간 사치를 넉넉하게 누리려 진주와 의령의 경계를 이루는 의령 장박마을로 향했습니다. 진주 시내를 에둘러 흐른 남강이 진주를 완전히 벗어나 의령과 함안으로 만나는 곳이 장박마을입니다. 진주 지수면에서 남강을 가로지르는 장박교를 건너면 의령입니다. 사람들에게만 있는 경계는 남강은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남강 물길이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닿으면 진주, 의령, 함안 세 지역이 경계를 이
날이 뿌옇게 밝아오는 시각, 벌떡 일어나 밥을 짓고 서하 먹을 국을 끓였다. 양파계란국이었다. 두부도 잘게 썰어넣었다. 아내는 정토회 모임으로 어젯밤 집을 비웠다.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는 소식에 밥상을 준비해두고 서둘러 밭으로 갔다. 김장 무씨를 뿌렸다.건너편 밭으로 가니 고라니가 그물망을 넘어뜨려 팥밭으로 들어간 듯했다. 군데군데 팥잎을 뜯어먹은 자국이 나있었다. 그물망을 손질하고 가을감자를 살폈다. 팔월 가뭄으로 가을감자가 이제야 싹을 피우고 있었다. 밭고랑 가득 자란 쇠비름과 바랭이를 뽑아냈다. 너무 늦게 자라는 감자가 걱정스
장마와 태풍이 끝나고 걷는 8월의 초록걸음은 흘린 땀을 보상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에 상사폭포가 있는 둘레길 5코스를 택했다. 함양 동강마을에서 산청 수철마을까지의 이 구간은 함양과 산청의 경계를 넘는 길로 아픈 지리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청 방곡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이 추모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통비분자로 몰려 국군들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700여 원혼과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5년에 조성되었다.이번 초록걸음은 동강마을도 수철마을도 아닌 산청 가현마을에서 길동무들에게
푹푹 찌는 날씨에도 PC방 순례를 빼먹지 않는 아들. 반팔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룰루랄라 집을 나서기 직전, 내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들아, 이 더위에 웬 청바지? 반바지 입어라. 보기만 해도 덥다.” 옷걸이에는 나실나실한 냉장고 반바지가 두 개나 걸려있었다. “하나도 안 더운데?” “안 덥기는. 청바지 뻣뻣한 걸 지금 뭐하러 꺼내서, 올 여름에 반바지를 두 개나 샀는데...” 잔소리가 길어질 걸 알아차린 녀석이 후다닥 뛰어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싫다고요, 반바지는 약해보인다고!”사실 요즘 아들의 가장 큰 고민은 ‘
아내는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아내가 제일 존경하는 스승께서 우리 집에 온다는 소식을 받은 뒤로 이것저것 챙기느라 잠자리에서도 뒤척거렸다. “우리 집 많이 불편한데 가까이에 있는 좋은 방 한 칸 잡아드리지.” “뭐 하룻밤인데.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으신가봐.” “연세도 많은데 에어컨 빵빵하고 실내에 화장실 있는 방에 모셔야지.” “보름에게 양해 구하고 카페방을 내 드리려고.” 카페에 딸린 황토방이 한 칸 있는데 아내는 그 방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거긴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으니 쓰기엔 편할 거였다.아내는 궁중음식연구원을
이 칠 장이 서는 함양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휴가철, 비 예보가 있었지만 참여자가 열 명이 넘었다. 비오는 날 마실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거기다 날이 뜨거운 때니 비가 오면 오히려 다니기에 수월하다. 함양 읍장 구경을 하고 상림을 들렀다가 지리산 오도재를 들를 것이다. 비오는 날의 상림공원을 기대한다.읍장답게 규모 있게 장이 섰다. 때를 맞아 나온 물외, 고구마줄기, 콩잎, 여주, 다슬기 등이 눈을 즐겁게 하고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었다. “아, 나 콩잎김치 진짜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가 해주셨는데..” “저 다슬기 보래, 푹
태풍 다나스로 인해 지리산 초록걸음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일정을 일주일 연기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번엔 장맛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지리산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길동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안상학 시인의 ‘장마’라는 시를 가슴에 품고서...세상 살기 힘든 날 /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 강가에 나가 /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 흔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뒷마당 창고로 갔다. 다행이 그 닭은 살아있었다. 걸음마다 풀썩풀썩 주저앉긴 하지만 두 눈은 뜨고 있었고,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있었다. 나는 닭을 가만히 안아 닭장에 넣어주었다.닭장을 살펴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바깥 탁자 아래 닭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밤에 몰아친 비바람으로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아 닭장에 넣어주었다. 암탉 일곱 마리에 수탉 한 마리, 암탉 한 마리가 모자랐다.비바람이 몰아친 지난밤이었다. 무심코 밖으로 나왔는데 뒷마당에서 닭들이 꼬꼬거렸다. 푸득이는 날
비 맞은 듯 땀 흘리는 요즘. 뜨거운 햇볕에 몸과 마음은 지쳐간다. 지친 마음에 쉼표 하나 그릴 수 있는 곳이 진주 금산면 금호지(일명 금산 못)다. 어디에서 서도 금호지의 넉넉한 품은 아늑하다. 금호지는 넓어 쉽사리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금호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신라 때 형성된 자연 못이라고 전해오는데 현재 전제 면적 20만 4937㎡, 평균 수심 5.5m이다. 전설에는 워낙 깊어 명주실 구리 3개가 들어갔다고 한다. 금호지 근처 커피숍에 차를 세우고 주위의 풍광을 두 눈 가득 꾹꾹 눌러 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