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농기계 소리는커녕 사람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일시에 사라진 듯했다. 이따금 공허하게 울리는 개짖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집배원이 다녀가는지 골목 속으로 한 줄기 오토바이의 굉음이 이어졌다 사라진다.경로당에서 봄나들이 가는 날이다. 해마다 봄이면 봄나들이를 간다. 이 봄나들이가 한 해 외출의 전부일 이웃들도 많았다. 장롱 속에 아껴 넣어둔 봄옷을 꺼내 입어보는 유일한 날이 바로 오늘일 것이다. 바닷가에 가서 유람선을 탈 거라고 했다. 먼 거리여서 걱정하는 노인들도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말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로 ‘심리 통제, 심리 제어, 심리 조절’로 바꿔 쓰라고 한다. ‘마음 통제, 마음 제어, 마음 조절’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보통 때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큰 시험장에 앉았을 때, 결혼식장에 신랑 또는 신부로 섰을 때, 재판정에 피고로 앉았을 때 마음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 우황청심환이 필요한 순간이 우리들의 인생에는 여러 차례 생기는 법이다. 마음 조절은 치과에 갈 때도 필요한 일이다.4월 11일 오전 10시경 치과에 갔다. 왼쪽 윗잇몸(상악동)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아들의 신발이 또 작아졌다. 6개월 전에 샀는데 밥 먹은 게 다 발로 갔나. 그새 키도 조금 더 자랐다. 이제는 마주서면 눈높이가 나보다 15도 정도 위에 있다. 코밑에는 수염도 제법 거뭇하다. 갓 모심기를 마친 초여름의 논 같다. 여린 솜털이 제법 촘촘하게 자라서 면도기를 하나 사야 되나 생각 중이다. 손도 나보다 커졌다. 작은 단풍잎만 하던 손이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아들의 몸이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목소리도 변성기가 와서 지하 3층에 내려가 있다. 반면 자기주장은 천정을 뚫고 나간다. 아들, 공부 좀 하지? 싫어. 책상정리
봄볕이 따가웠다. 벌써 며칠간 더위가 계속되었다.다랑이논밭이 붐비기 시작했다. 트랙터와 경운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노인네들은 힘겨운 괭이질이다. 경운기나 트랙터로 일품을 파는 이들은 몇 되지도 않는데 여기저기 구석구석 논밭은 많으니 밭일을 서로 빨리 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올해는 감자를 많이 심었다. 해마다 홍감자와 흰감자를 섞어 조금 나누고 우리 먹을 만큼만 심었는데 나누다 보면 우리가 먹을 것은 작은 것만 남고, 턱없이 부족하여 사다 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쨌거나 기초농산물만큼은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켜나가야겠다는
4월 1~2일 현재, 온 세상이 벚꽃 천지다. 대개 봄꽃들이 그러하듯이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운다. 대개 봄꽃들이 그러하듯이 한꺼번에 일제히 흐드러지게 핀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삼라만상에 승리의 환희를 전한다. 매화, 개나리, 산수유 들이 봄 전령사라면 벚꽃은 봄의 절정에 점을 하나 찍는다. 점이 너무 많아 탈이라고 할 정도다.진주시 신안동, 평거동, 판문동, 이현동에 걸쳐 있는 석갑산, 숙호산, 판문산은 한두 시간 잠시 잠깐 돌아다니기 좋은 뒷동산이다. 신안동 숯골에서 석갑산 품으로 들어가자면 편백나무 숲이 우렁차다. 겨
바야흐로 동문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동문이란 무엇이던가?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였거나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이다. 동문회란 그 사람들의 모임이겠다. 동문이란 참 좋은 것이고 동문회라는 모임도 참 좋은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수학한 인연은 참 깊은 인연이다.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더욱 각별한 인연이다.대개 초등학교 동문회, 중학교 동문회, 고등학교 동문회, 대학교 동문회 들을 한다. 대학원생들도 동문회를 할 것이다. 대학에 개설해 놓은 ‘무슨무슨 과정’을 1년 동안 다닌 사람들도 동문회를 한다.
눈이 왔다. 그날 아침 날씨를 확인하려고 부엌에서 작은 쪽문을 열었을 때 제법 하얗게 쌓인 눈을 보는 순간 잠깐만, 머릿속의 두꺼비집을 한번 껐다가 다시 켰다. 희다 못해 약간 푸른 빛마저 감도는 아파트 마당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잠이 덜 깬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눈이 왔다. 꽃피는 춘삼월에 아무런 기별도 없이, 뜬금없이 그렇게.덕분에 그 날 아침은 아들을 깨우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녀석은 눈이 왔다는 말에 부스스 창문 앞으로 기어가서 제 눈앞의 광경을 확인하
군수가 감옥에 들어갔다. 네 명의 군수가 내리 감옥행이다. 내가 이곳 지리산이 마주보이는 산골에 터를 잡고 들어오자마자 시작된 군수의 감옥행을 이번 군수도 비켜가지 못했다. 대개 부패 혐의다. 특히 이번 군수는 과장 진급자로부터 고액을 수수한 매관매직 뇌물수뢰 혐의다.그동안 살아가기가 참 불편하고 험했다. 공직사회가 청렴하지 못하면 지역주민의 삶이 팍팍하기 마련이다. 귀농귀촌을 계획하려면 먼저 그 지역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따져봐야 한다. 귀농 10년, 이제껏 경험으로 감히 말하건대 내가 사는 이런 곳은 귀농할 만 한 곳이 못된다.
“병원에서 뭐라는데.”“염증이 심하대. 암 검사 해보자 해서 하고 왔어.”“결과는 언제 나오는데.”...“열흘쯤 뒤에 나온대.”오줌을 마려워하는 꽃분이를 마당으로 내 주고 들어와 다시 누웠다. 방바닥이 따뜻하다. 며칠 전에 들여온 수탉이 홰를 치며 길게 울었다.“그때는 병원에 같이 가보자.”“밭일도 많은데 혼자 가지 뭐.”“당신 몸도 자꾸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종합건강검진이라도 한번 받아보자.”“아이구, 괜찮아. 지금 조금 아픈 건데 뭐.” 꽃분이가 현관문을 긁는다. 다시 들어온 꽃분이는 고미와 장난질이
바텐더 일을 한 지도 18년째가 되었다. 같이 일을 시작했던 선배,동료, 직접 가르친 후배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텐더가 되기를 포기하고 방향을 틀었다. 바텐더가 되면서 결심했던 “진주 최고의 바텐더가 되자” 라던 소원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제 최고가 아닌 최고령의 바텐더가 되는 것으로 귀결됐고 여전히 돈 못 버는 미련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살고 있다.불혹이 된 지금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적은 돈이나마 벌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난하고 조금 부족하지만 부끄럽지 않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간이 배 밖에 나왔었나 보다. 친구 승배와 진주에 놀러 왔다. 어쩌자고 그런 작정을 한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마이크로버스 타고 40~50분가량 걸려 진주에 내렸다. 나는 진주가 거의 처음이었지만 이 친구는 몇 번 왔다 갔다 한 모양이다.장대동 마이크로버스주차장 근처에서 짜장면을 사 먹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교에 놀라고 진주성에 놀라고 그 옆 제일극장에 놀라느라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연암도서관을 구경하고 나오다가 제일극장 옆 계단 모퉁이에 있던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승배는 무엇을 샀던지 모르겠다
새 학기를 맞이한 아들이 ‘학생 생활 조사서’를 가져왔다. 가족 구성원의 이름과 집주소 등을 거침없이 써내려가다 멈춘 곳은 장래희망을 묻는 항목이었다. 학생 본인과 학부모가 원하는 장래희망을 각각 쓰도록 되어있었다. 아들은 ‘웹툰작가’를, 나는 ‘건축설계사’를 각자 썼다. 날 쏘아보는 아들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이게 뭐냐고? 건물 지을 때 설계도 그리는 사람.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이 그림은 아니지. 나는 이런 거 완전 싫다고” “그럼 뭐 어때. 너는 니가 원하는 거 썼잖아. 나도
“아이쿠, 아 아 아...” 440번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고통에 못 이겨 팔짝팔짝 까치발을 뛰었다. ‘툭’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난 걸로 봐서 이번엔 좀 세게 걷어차인 것 같았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익살스러워 모두가 히히덕거렸고, 440번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빙그레 웃어보였다440번은 나의 따까리였다. 나이는 내 또래였는데 이마에 예닐곱 개의 별판을 달고 있었다. 키는 작았고, 눈은 부리부리했고, 몸집은 단단했다. 닳고 닳은 차돌멩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나의 장난질과 푸념을 받아주는 따까리였다. 물을 찾으면
05:13 뒤척이다 눈을 떴다. 매일 이 시각이면 눈을 뜬다. 아내는 밤 11시에 방영하는 ‘미스티’라는 드라마에 빠져 다음 날은 영락없이 늦잠이다. 기지개를 켜는데 온 몸이 뻑적지근하다. 어제 땔감나무를 하느라 몸을 많이 썼었다. 컴퓨터를 켰다. 이런저런 매체를 드나들며 세상사를 엿본다. 민박 예약현황을 확인한다. 방바닥이 서늘하다. 밖으로 나가 화목보일러에 나무를 넣어주고 온도를 맞췄다. 잠시 서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을 갓 넘긴 달이 서산으로 기운다. 새벽인데도 그다지 춥지 않다. 봄이다. 인기척에 뒷마당 거위 ‘덤벙이
일요일 아침 7시쯤 목욕하러 나선다. 1시간쯤 뒤 돌아오면 배가 고플 게 뻔하다. 보통 6시 30분쯤 밥을 먹으니까. 찌개를 뭘 끓일까 생각하다가, 설날 얻어 놓은 돼지 수육이 떠올랐다. 김장김치를 숭숭 썰어 먼저 끓이다가 수육과 두부를 넣으면 얼큰한 김치찌개가 된다. 수육으로 김치찌개를 끓이는 건 내 비법이다. 김치찌개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펭귄유통은 대개 8시쯤 문을 여는데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게 생겼다. 목욕비와 두부값을 운동복 주머니에 넣고 대문을 나섰다.그런데 웬걸. 펭귄유통(요즘은 ‘펭귄 프레시
"4캔에 만 원? 12캔에 만 원??"요즘 광고나 마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4캔에 만 원이라는 건 수입 캔맥주 4개에 만 원이라는 건 알겠는데 12캔에 만 원은 또 뭐란 말인가? 만 원에 12캔이나 주면 맥주회사는 남는 게 있나? 질이 떨어지니 싸게 파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만 싸니까 일단 한 번 사볼까 하고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맥주 냉장고 앞에서 호갱이 되지 않을 몇 가지 사실을 알려 드리려 한다.수입 캔맥주는 어떻게 500ml 4캔에 만 원이 가능한 것일까? 국산 맥주의 경우 출고가가 거의 정해져
아들이 수면 독립을 선언했다. 사실 그동안 아들은 혼자 잠들기 무서워 해서 밤마다 이불을 들고 안방으로 달려오기 일쑤였다. 남편은 덩치만 큰 아기라고 놀려댔다.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아들을 감싸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저렇게 마음이 여리고 겁이 많아서 어쩌나. 좀 더 대범하게 키우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그랬던 아들이 이제야 아니, 이제라도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그래, 너는 조금 늦게 피는 꽃이었어. 기다리면 되는 걸 괜히 조바심 냈구나. 흡족해 하며 아들의 수면 독립에 박수를 보냈다. 물론 아침
끼니가 다가오면 걱정이 생겼다. 꼭 내가 해야 할 걱정은 아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서하(손녀)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저 어린 것이 밥을 많이도 먹는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국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후루룩 들고 마신다. 밥 한 숟갈에 국물 한 숟갈은 기본이다. 국물이 문제다. 맵싸한 맛을 유달리 좋아하는 나는 국을 끓일 때는 국의 종류를 불문하고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었다. 심지어는 김치찌개에도 썰어 넣었다. 그런 맵싸한 국물을 요즘은 통 먹을 수가 없다. 서하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청양고추는
장마가 끝나고 날씨는 무더웠다. 재소자들은 땀을 쏟으며 무를 뽑고 있었다. 무는 크고 나무토막 같았다. 봄무를 심었는데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울 때까지 키웠으니 심이 단단히 박혔고, 웬만한 사람의 허벅지만한 것도 있었다.출역①을 하면서 취사장 앞을 지나올 때면 취사부들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무를 좀 보내라. 칼이 안 들어간다.’며 경운출역부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이 무는 감호소와 교도소 재소자들의 부식용이었다.교도소가 하는 농삿일이지만 작업과에서 농사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용도과에 파는 형식이었다. 용도과는 이 농산물을
평창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감동적인 개회식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NBC의 일본 식민지배 관련 발언으로 세간이 시끄럽다. 해당 발언을 한 해설자는 개인적 사과 없이 해고되는 걸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 발언을 들으며 우리 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본에 대해 생각했고 이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히 섞여 있지만 종류에 상관없이 "우리 술을 망쳐버린 건 일본이다." 세수 확보를 위하여 우리의 누룩을 단일화시켜 버리고 후에는 개인적으로 술을 빚는 것도 금지해 당시 수천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막걸리들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