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가 왔다. 여름 철새인 파랑새는 4월말이면 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녀석들의 짹짹거리는 소리가 봄 하늘을 가득 채운다. 우리 마을이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았고, 고목들이 많아 서식환경이 좋은 것 같다.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샛노란 깃털로 치장한 꾀꼬리가 찾아오고, 다랑이논에 물을 잡기 시작하면 왜가리와 쇠백로도 나타나 그 좋은 경치에 화룡정점을 찍어준다.이 산골에 들어와 처음으로 파랑새를 보았었다. 조그맣고 예쁘장하고 유순할 것 같았던 파랑새에 대한 상상은 그러나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파랑새는 거칠었다. 사나웠고, 비둘기만한
1년에 10시간~15시간, 아들은 봉사활동을 한다.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거나 관공서 등지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도장을 받는데, 그 봉사점수가 내신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정확한 시간 확인이 필수. 이쯤 되면 말이 봉사활동이지 일종의 비즈니스 활동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처음엔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던 녀석도 3년쯤 하다 보니 이력이 붙었는지,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점수 따기 용이라도 기왕이면 좀 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 좋을 텐데. 덩달아 나도 사방으로 레이더를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중앙시장의 큰길을 따라 걷다 꿀빵 가게 앞에서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어둑한 공간을 하나 마주하게 된다.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이곳은 새벽에 수산시장이 열리는 장소이다. 낮에는 마치 잠자듯 조용하지만, 오전 1시쯤 되면 활기를 띤다. 야트막한
올해 봄은 더 힘들었다. 농토가 많이 늘기도 했지만 봄나물 뜯는다고 산에도 자주 다녔다. 얼굴엔 가시덤불 헤집고 다니다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겨우내 볼록하게 나왔던 아랫배가 쑥 들어갔다.어제는 다래순을 따러 갔었다. 봄철 숲에서 채취하는 나물 중 최고로 치는 것이 다래순이었다. 평상에 모이는 성샌과 영남아지매가 내 뒤를 따랐다. 젊은 시절 산을 자기네 안방 드나들 듯 했을 이 두 이웃은 그러나 이제 많이 늙어있었다. 산을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무릎도 허리도 좋지 않다면서도 내 뒤를 졸졸 잘 따라다녔다.여느 봄나물이
주변 이들에게 자주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나 있잖아. 십대 후반, 이십대 때, 삼십 너머 삶이 있다고 생각을 안했던 것 같아. 사람의 삶으로 생각이 안 들었어.“ 이런 생각이나 느낌 공감될 것이다.장 마실 나들이는, 예상치 않았지만 그 늙음과 직면하는 것이다.날은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세월호 참사 5년 행사가 있어 마실 나들이를 잠시 망설였지만 모임 대표라는 책임이 앞섰고 가까운 곳이라 무겁지 않게 나섰다. 사월의 목적지는 진주시 (일)반성 장이다. 반성 장은 진주에서 면단위에서 서는 장 가운데는 가장 큰 장이다. 그리고 내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밥 먹다 말고 아들이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잠시 숟가락질을 멈췄다. 놀라거나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저 말의 배경이 짐작되었기 때문. 그 사이 머릿속에선 5G 속도로 계산기가 돌아갔다. 남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빠도 그렇다.” 이런. 선수를 빼앗겼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남편의 얼굴에선 불경기의 여파를 감내하는 가장의 책임감이 무겁게 배어났다. 아빠의 속뜻을 백분의 일이라도 알 턱이 없는 아들은 이내 생글생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빠도 그래요? 나랑 똑같네! 그럼 우리 같이 게임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남다른 한복을 만드는 계기? 발품 파는 게 최선한복들이 멋스럽게 전시된 거리를 지나 명신주단이라고 적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한복집이라 생각하면 여 사장님을 예상하는데 푸근한 웃음으로 남자 사장님께서 반겨주신다. “반갑습니다, 어서오세요” 정
아침 이른 시간부터 대밭 아래 노샌댁에서 쿠릉쿠릉 포클레인 소리가 요란했다. 무슨 일인가고 달려가니 새 집을 짓는다며 살던 집을 허물고 있었다. 홀로 사는 옛 집이니 볼품이야 없었지만 늦가을 처마아래 곶감을 주렁주렁 걸어놓으면 가장 폼 나는 집이기도 했다. 포클레인 삽날이 아직 지붕까지 쓰러뜨리지는 않았고 작업하기 좋으라고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내 눈길은 방문에서 멎었다. 아직은 쓸 만한 문짝이 그대로 달려있었다. “아니, 저 방문은 어쩌려고요.” “방문은 왜요? 그냥 치우려는 참인데.” 건축업자가 팔짱을 낀 채 작업하는 포클레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믿음만으로 시작된 구두장이의 삶덕미양화점은 중앙시장 터줏대감 격이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다. 인터뷰 할 곳을 추천 받기 위해 시장번영회를 찾았을 때도 첫 번째로 추천 해준 곳이 덕미양화점이었다. 점포는 시장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공영주차장을 기준
"잘 먹을 게요. 열심히 하세요.” 피자를 배달해주고 가는 젊은이의 등에 대고 내가 한 말이었다. 이 산골에 들어오고 십이 년이 흘렀지만 이렇게 집에서 피자를 시키기는 처음이었다.며칠 전 오후 낯선 젊은이가 마을에 나타났었다. 한 묶음의 전단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제법 많은 스티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마을을 돌아나간 뒤 우리집 우편함에 전단지가 꽂혔고 스티커 한 장이 붙어있었다. ‘지정환피자 지리산점 오픈’ 임실치즈로 유명한 지정환피자를 이 산골짝에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짠~ 이게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중앙시장 2층 비단길 청년몰 옆, 줄지어 있는 조용한 한복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 앞마다 아지매들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약속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리니 반갑게 맞아주시던 박정순 아지매. 아지매 만큼 방안을 환히 비추는 햇살이 참 따뜻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아들은 이제 중3.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실체는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중2병에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화를 내다가도 PC방 갈 돈이 필요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그런 증세. 식탁에서 동생이 자기보다 큰 햄을 먹었다고 분노하는 그런 증세. 그러나 중2병은 단순히 학년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아들의 책상에서 그 사실을 입증할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A4용지 한 장을 빡빡하게 채운, 어떤 목록이었다.맨 위에는 제목이 크게 적혀있었다. ‘2019 버킷리스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옛날부터 진주 장시는 면포, 종이 등 수공업품 생산지로서 지위가 높았다. 그 가운데 종이를 활발히 유통했던 ‘진주 중앙지업사’는 1950년대부터 68년 정도 운영되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친정어머니를 거쳐 조현숙 아지매까지.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
‘오늘 품삯 받는다. 퇴근할 때 족발 하나 사오너라. 실상사 앞 한생명에 들러 서하 좋아할 만한 라면도 좀 사고.’ 오후 쉴참을 먹고 아들께 문자를 보냈다. 내가 처한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판을 만들어야 했다. 엊그제 읍내에 나가 자목련과 백목련을 한 그루씩 사와서 심어준 것으로 아내의 켕긴 마음을 풀어주기에는 많이 모자란 듯했다. “이번엔 여행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혼기념일 저녁이었다. 밥상을 앞에 놓고 아내가 중얼거렸다. “우짜노, 할 수 없지.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내 목소리엔 피곤함과 짜증이
[편집자 주] 진주지역 청년들(진주중앙유등시장 청년기록단)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말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 작은 책자를 펴냈다. 책자 이름은 ‘시장, 추억을 쌓다’이다. 총 8편의 기록을 단디뉴스가 기사화한다. 젊은 청년들의 눈에 중앙시장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진주중앙유등시장에서 30년간 ‘쌀’이라는 품목 하나로 자리를 지켜온 문보금 아지매. 중앙시장만큼이나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중앙시장 청년 기록단의 한 명으로 아지매의 시간을 기록하고자, 선봉 쌀 상회를 찾았다.“집에 남편이 도매업으로 쌀장사를
‘언제나 사랑해’ 가끔 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마지막에 적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솔직히 나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특히 아들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주변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할 때, 해야 할 일을 미룰 때, 내 속에서는 불기둥이 솟구친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하지만 화가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분노의 화염 방사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사랑은 이미 잿더미가 된다.아들이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청포도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산 청포도가 3알 남았는데 그것을 10
서하가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딛은 셈이다. 아침시간이 급하게 돌아간다. 밥 먹는 시간도 많이 당겨졌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뭐하고 놀았대?” “친구들과는 잘 어울려 지내고?” “오늘 간식은 뭐 나왔대? 잘 먹기는 하고?” 가족이 모인 저녁밥상 앞에서는 온통 서하 어린이집 얘기였다. 혼자 집에만 있다 또래의 아이들을 만났으니 무슨 장난을 하는지, 여전히 잘 웃는지,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하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우리 집으로부터 10km도 더 떨어져 있다.“아버님이세요
“이젠 술을 끊든지 해야겠어.” 그렇게 말해놓고 고작 사흘 만에 술독에 빠진 꼴을 보이기 일쑤였다. “얼마간이라도 술을 끊어야지.” 그렇게 다짐하건만 그 얼마간은 결코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몸이 전 같지 않아. 술을 좀 줄여야겠어.” 한 자리서 석 잔 더는 마시지 않을 거라는 약속은 하루에 무너졌다. 무엇을 탓해야할까. 아내는 내 의지 탓이라지만 열다섯 해 동안 피워오던 담배는 단박에 끊어버렸었다. 담배 끊는 사람은 독한 사람이니 가급적 피하라 하지 않던가. 그만큼 나는 독한 사람이었다.술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분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것인가, 원고 약속을 지킬 것인가. 내 안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면 별거 아니야,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아들이 나중에 알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넌 그 소심증이 문제야. 침소봉대가 어째 갈수록 더 커지냐. 겨우 티끌 같은 문제라니까.’ ‘티끌? 요즘 미세먼지가 암보다 무섭다는 거 몰라? 가뜩이나 예민한 나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커서는 이미 저만큼 가 있는데!’겨울방학동안 아들에게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마당에 내려서자 새벽 별자리는 어느새 봄. 이제 곧 아침이 오고, 세상은 새로운 모습을 내 앞에 펼쳐놓겠지. 내년부터 받는 걸로 알고 있던 국민연금을 올해부터 받게 된다는 사실을 엊그제 알았다. 삼월이 생월이니 사월부터 매달 꼬박꼬박 받게 된다. 이 살림살이에 오십만 원은 큰돈이다. 그것도 내년부터 받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로 한 해가 당겨졌으니 일 년 동안 공돈처럼 받게 된 셈이다.“이십 년 된 저 냉장고부터 바꾸자.” 그런 사실을 알고 아내와 맨 처음 나눈 말이 이랬다. 오래 되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웅웅거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