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파김치처럼 축축 처지는 날. 문득 궁금했던 그곳을 찾아가고 싶었다. 힘을 채워보고 싶었다. 남해고속도로 동진주(문산) 나들목과 문산휴게소 뒤편 언덕을 내달리는 하얀 말들이 내게 힘을 전해줄 듯싶었다. 달리고 싶었다.경상남도 진주시 혁신도시 충무공동사무소 주차장에 들어서자 방긋 웃는 논개 캐릭터 아래에는 큰 칼 왼손에 꽉 쥐고 오른손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유등이 먼저 반긴다. 주차장 뒤편으로 걸어가면 산양을 닮은 조형물이 작은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오는 하얀울 공원이 나온다. 더위에도
한창 더위로 숨이 턱턱 막힌다.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일하는 나를 위해 떠났다. 쉬고 싶을 때는 숲으로 간다. 흐르는 물살에 발 담그고 있노라면 어느덧 초록빛이 친구처럼 찾아드는 곳을 찾아 8월 4일 경남 함양 상림공원으로 길을 떠났다.상림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근처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냉커피를 샀다. 마치 소풍 나온 아이처럼 설레며 상림의 초록빛 가득한 숲으로 들어갔다. 지난달 29일부터 시작해 이달 2일까지 열린 ‘함양산삼축제’의 흔적의 공원 입구부터 가득했다. 여기저기 행사장을 정리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많다. 상림
더위에 숨넘어간다.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일할 때면 시원한 바다와 계곡이 나도 몰래 떠오른다. 도심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마음마저 시원하게 씻어주는 풍경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진주에서 사천으로 가는 길 경상대학교 가좌캠퍼스를 지나 정촌면 예하리 예하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강주연못이 나온다. 강주는 진주의 옛 지명이다.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 강주(康州)를 진주로 개칭해 현재에 이른다. 이곳 강주 연못은 군대가 머물렀는데 강주 진영(陣營)이 있던 자리다. 강주 연못은 정확하게 언제 축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강주라는 지명
마흔다섯, 죽음을 선택한 그에게 같은 나이인 나는 묻고 싶었다. 모진 고문 속에 천주교를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라는 종교 배반과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털어놓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배신을 마다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았는지 알고 싶었다. 더구나 고려 말 충신으로 이름 드높은 정온의 18대손 후손으로 나라에서 금지한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그는 정찬문 안토니오다. 그는 성인의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로 2014년 우리나라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에서 선포되었다. 후덥지근한 11일, 아침을 먹기 바쁘게 부랴부랴
올해 초 백일기도로 왕이 된 조선 시대 인조의 흔적이 머문 경남 진주 성전암으로 가는 길에 ‘평촌리 은헌고택’을 지났다. 다음 기회에 하면서 미룬 게 여러 달이 가버렸다. 마치 빌려준 돈을 꼭 찾을 요량처럼 6월 23일은 점심을 먹기 부리나케 길을 나섰다. 진주에서 창원 마산으로 향하는 진마대로 이반성 교차로에서 빠져 이반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 소재지를 지나 좀 더 올라가면 옛 평촌역이 나오는 삼거리를 지나면 은헌고택이 있는 중도마을이 나온다. 개망초가 하얗게 무리 지어 핀 길을 지나자 고택으로 가지 않고 오른편으로 나도 모르게
“아빠 휴대폰 좀 가져다줘~”3주 전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중에 급하게 아이를 찾았다. 참가비 무료에 선착순 마감이라 적힌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독자의 만남 이벤트 알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 경남 최초를 찾아서’라는 주제였다. 문자로 참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새신랑처럼 6월 18일을 첫날밤처럼 기다렸다. 6월 18일 30여 명의 참가자와 함께 진주시 문산읍에 있는 문산성당을 먼저 찾았다. 문산시장 근처에 버스는 멈추고 50m가량 골목길을 지나자 한적한 기와집 뒤로 뾰족한 고딕 건물이 나오는 데 바로 문산성당이다. 문산
남해바래길을 4코스까지 걷고 나니 문득 정해진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코스가 설천해안도로다. 하동에서 남해대교를 지나면 보통은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읍 쪽으로 향한다. 대신 좌회전해 설천면 바닷가를 따라 에도는 길이 설천해안도로다. 이 도로도 완전히 바다와 붙어 있지는 않다. 바닷가를 따라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들이 또 있다. 이 길을 따르면 오른편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다랑논이, 왼편으로는 굽이굽이 갯벌이 펼쳐진다.◇남해대교와 노량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서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본다. 매번 남해섬을 다니면서 한
바다에 난데없이 쫓고 쫓기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난바다에서 거제 북쪽을 돌아 뭍을 향해 죽자하고 펄떡펄떡 뛰어 도망을 친다. 그 뒤로 만 발이나 되는 이무기가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쫓는데 아가리에 들듯 말듯 헛입질이 간당간당한다. 바다에서 개구리나 뱀이 어떻게 살 수 있냐고 따지지 말자 어차피 옛날 이바구니까.이들이 유호 마을 앞바다에 다달았을때 기어코 이무기가 개구리를 덮쳤겄다. 똬리를 틀어 옴짝달싹 못하게 휘감고는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한 입에 삼키려 드는구나. 이 때 옆에 있던 학섬이 지진이라도
5월 나흘 연휴 동안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가볍게 길을 나섰다. 벼랑이 병풍처럼 남강을 에워싸는 봉우리가 일곱 개라는 칠봉산을 5월 9일 찾았다. 산을 본 적은 무수히 많다. 정작 칠봉산에 오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진주 시내에서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누구나 소풍 장소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굴바구’, ‘굴바위’라고도 부른 산 아래 모래밭에서 놀았지만, 산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큰 바위의 산이었다. 진주시 하대동 집을 나서 평거동 희망교를 지나 내동면 독산리 휴먼빌 아파트 정문 앞을 지
1905년 5월 27일 밤 2시 45분경,바다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해협을 일단의 함대가 소리 없이 들어섰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배의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선수와 선미의 마스트등과 적색 녹색의 좌우현등은 물론 선실의 불빛까지 가리고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선단을 멀찍이서 몰래 따르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선실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보고 쫓아온 일본의 순양함이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 적임을 확인한 척후선은 새벽 네 시경 본영에 전문을 날린다."러시아 국적 함대 출현. 쓰시마 남단에서 북동으로 항진 중."
“의병, 의무병 아닌가요?”사회복지시설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20대 청년의 의병에 관한 대답이다. 그러나 의병(義兵)은 ‘옛날에 나라를 지키려고 백성들이 스스로 일으킨 군대(『보리 국어사전』)’를 뜻한다. 민중 스스로 외적에 대항해 싸운 구국 민병인 셈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과 구한말 을미사변과 국권 상실 전후의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의병을 기념하는 의병축제가 열리는 경남 의령으로 22일과 24일 다녀왔다. 22일은 내가 일하는 산청 장애인생활복지시설 내 장애인 11명과 나들이였다면 24일은 아내와 막내아들과 함
오색찬란한 꽃들의 유혹이 강렬하다. 싱그러운 연두의 향연도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봄바람과 함께 여행을 떠날 참이다. 따스한 햇볕과 공기를 만끽하기에는 자전거만한 친구도 없다.무수한 길을 품은 섬진강으로 떠났다. 이번 섬진강 여행의 또 다른 이름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중 일부를 걷는 것이다.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는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당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길을 역사 스토리 테마길로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왕자에게 한 말이다. 나도 직장 나들이 장소가 결정 나면서 행복해졌다. 그리고 기다려졌다. 기다리는 동안 『이순신평전』과 『인간 이순신평전』 두 권의 책을 번갯불에 게눈 감추듯 읽었다. 장소는 다름 아닌 경남 통영. 통영이라는 이름처럼 조선 수군 통제영이 있던 곳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데래야 델 수 없는 이순신의 흔적이 짙게 드리운 곳이다. 즐겁게 기다린 그 날은 비가 내렸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지난 7일 내렸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 일본인들은 몰랐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몰라서는 안 되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김준민 장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3월 30일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로 향했다. 진주에서 옛 마산으로 가는 ‘진마대로’를 타고 가다 월성 교차로 지나 발산리에서 빠져나오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발산리는 진주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발산고개를
달이 뜬 자리에 해도 뜬다. 두 봉우리 사이로 뜨는 달과 해는 천하일품이다. 두 봉우리는 낙타 쌍봉을 닮았다. 봉긋 솟은 여인의 젖가슴 같은 두 봉우리 사이로 ‘휘영청 둥근 달을 토해놓는 풍경이 아름다워 아산토월(牙山吐月)’ 이라했다. 산 이름도 ‘월아산(月牙山)’이다. 달음산이라고도 한다. 아침 해돋이도 아름답다. 해돋이는 경남 진주 8경 중 하나다. 금호지(금산연못)에 비친 달과 해의 모습은 언제나 사람들을 푸근하게 한다. 봄 햇살은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가만히 잊지 못하게 하는 봄바람에 달이 뜨고 해가 뜨는 아름다운 풍경
하청(河淸). 만의 서북쪽을 칠천도가 가로막아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달 비추니 물이 맑고 하늘이 밝아 하청이라 했다. 거제에 딸린 섬 중에서 가장 큰 칠천도와 실전 사이의 좁은 수로를 지나 하청만으로 들어서면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 속 어딘가에 거북선이 잠들어 있다.4백여 년 전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전한 칠천량 해전의 아비규환이 들리는 현장이다. 싸움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알고자 갯가에 서니 발아래 찰랑이는 잔물결만 보일뿐 큰 물굽이가 보이지 않는다. 칠천량 해전의 숲을
볕 좋은 날이었다. 바람 한점마저 엉덩이를 들썩들썩 이게 하는 날이었다. 어디론가 훌쩍 봄 마중 떠나고 싶은 3월 3일 들썩이는 마음은 봄 마중을 마다하고 경남 진주 진성면 용고미 마을로 향하게 했다. 아내를 아홉 번이나 내쫓고도 나라에서 칭찬을 받은 사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금산면 월아마을 입구에서 월아산을 넘어 진성면으로 가는 길가에는 나무들이 민낯이다. 한 달 뒤쯤 봄이 농익어갈 무렵이면 하얗게 필 2,000그루의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룰 것이다. 이 고갯길을 하얗게 물들일 그때를 떠올리니 즐겁다
새해 다짐이 무디어 간다. 처음 먹었던 마음을 그대로 실천하기 힘들다. 찌든 마음을 헹구고 안일해지는 내 마음을 벼리기 위해 떠났다. 백일기도로 왕이 된 인조의 흔적이 머문 성전암을 향해 2월 21일 오후 햇살을 길라잡이 삼아 집을 나섰다.경남 진주에서 옛 마산으로 가는 국도에서 경남수목원 교차로를 지나 이반성 교차로에서 빠져나왔다. 길을 따라 앞으로 가면 저수지 하나 지나 이내 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 소재지가 끝날 무렵 태극기가 바람이 펄럭이는데 노란 바탕에 붉게 쓴 밀면이라는 간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겨울은 갈 듯 말 듯 아직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봄은 올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운다. 세상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겨우내 바라봤던, 바짝 앙상한 몸을 드러낸 나무가 새삼 쓸쓸해 보인다.눈과 입이 즐거운 여행이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인천으로 떠났다. 인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 그리고 그곳과 이웃한 차이나타운은 눈과 입의 즐거움을 확실히 보장하는 곳이다. 인천역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불편하지 않다. 어느 곳을 먼저 들러도 좋다.선명하게 치장한 동화마을의 탄생은 여느 지역의 벽화마을이 품은 사연과 별반
짧은 반팔 소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중국의 유럽이라 불리는 칭따오!!! 익숙한 산둥성의 동쪽 청도!!!혼자 다녔던 한여름의 태산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것이리라. 이곳 청도에서도 호텔은 기차역 옆을 예약했다. 종점이므로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공항버스에 올라타고선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았다. 여유롭게 배낭도 의자위에 아무렇게나 둔다. 석달전 중국여행시 공항버스에서 배낭을 무릎에 놓고 안고 있었던걸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이 먼 타지에서 겁없이 버스에 오른... 대한민국 아짐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