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후의 한국 축구는 그만저만했다. 그러므로 애어른 할 것 없이 그저 붉은 티 한 장씩 걸치고 팔짝팔짝 뛰던 2002년의 성취는 다만 ‘기적적’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크고 작은 대회마다 4강이 원대한 목표였으나 4강이란 것이 한번 해봤다고 단골로 오를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다. 당차게 벼르고 장도에 올랐으나 빈번히 16강의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때의 번뜩이던 기운으로 솟아올랐던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도 이미 은퇴했다. 박항서 감독이 일으킨 바람으로 동남아의 ‘용’이 된 자국의 전사에 환호하며 붉은 대열을 이뤄 경적 울리며
배영학교 운동장이었을 땐 넓디 너른 마당이었는데 어째 손바닥만 해졌는가. 머시마들이 돌멩이 두 개 벌여놓은 것으로 골대 삼아 축구팀 두 개가 섞여 씨근덕거리며 후차댕기던 마당이다. 한쪽에선 딸아이들이 마주든 고무줄을 무릎께에서 어깨까지 오르내리며 ‘사까다찌’를 하던 광경이 아직도 선연하다. 담장 가 플라타너스 그늘엔 철봉대 나란히 섰고 분꽃, 다알리아, 채송화 심어진 화단 명색이 포실했다. 그러고도 여백이 많은 마당이었다. 하마 소년의 시절엔 그 모든 것이 그리도 컸던가. 우체국 옆에 소방서 다음엔 경찰서 그리고 교회를 지나며 만화
윤지오씨가 ‘사건’ 속 사내들 중 유일하게 기소된 전직 조선일보 기자의 재판 증언을 마치고 나와 질문 공세에 답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슴벅 아린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얽혀든 뜻밖의 사건으로 10년 세월 갖은 고초를 겪은 그녀의 설움이 읽힌다. 사건 현장의 유일한 증언자로 나섰으나 믿어주고 도와주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는 눈 흘김 당하고 가해자들로부터는 위협당하는 끔찍한 세월을 용케 잘 견뎠다. 작년 ‘미투’를 이끈 서지현 검사가 공동체 내부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듯이 윤지오씨의 용기 있는 행동 또한 놀라운 결과를
지중해 연안을 돌며 풍요한 서구 본토의 여유를 핥던 ‘알쓸신잡’ 팀이 느닷없이 ‘진주’로 날아왔고 단연 그것은 지난 연말 시중의 화제였다. 진주성과 여고, 과학관을 훑은 이야기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주섬거리던 도립병원 뒤의 ‘식당’도 이야깃거리였고 공룡이나 운석도 새삼 들먹여졌다. 고향의 면면을 TV로 보니 마치 낯선 대처의 군중 틈에서 뜻밖에 만난 피붙이의 그것처럼 왠지 아련하고 코끝 시큰하다. 그런 한편으로 “근데 보일 게 저것밖에 없었나?” 하는 미진한 맘도 든다. 녹화 당시가 유등축제의 와중이었음에도 유등의 ‘이응’도 들먹이지
그저 번드르르한 말로 입술을 나불거린다고 그런 칭호를 얻을 수 있으랴. 처음엔 유수같이 흐르는 쉼 없는 ‘말빨’에 질려 찬탄 반 조롱 반으로 부른 별호였을 터. 그러나 백기완 방배추 황석영 선생을 ‘조선 3대 구라’라고 일컫고 그게 전설처럼 굳어져 회자하는 것은 그들이 세 가지쯤의 요건을 갖춘 보기 드문 인물들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셋은 꽉 차게 살아온 밀도 높은 인생, 일가를 이룬 지성, 그리고 통 큰 포부와 그걸 이루는 능력의 탁월함이다. 아직은 평가가 이르겠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이 한국 현대사의 한 가닥 굵은 노정이었고 변
스탈린이 신임하던 충직한 졸개로서 충성을 다하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이 죽은 후 그의 ‘격하 운동’을 벌이며 권력 장악에 들어간 사실을 빗댄 우스개라던가?스탈린이 흐루시초프에게 어려움에 직면할 때 하나씩 펼쳐보라며 세 통의 봉투를 건넸단다. 서기장에 오른 후 첫 번째 봉투를 여니 “전임자를 깎아내리고 공격하라”라고 썼다. 잠자코 따랐다. 얼마 뒤 다시 어려움에 부닥쳐 열어본 두 번째 봉투에는 “언론을 장악하라” 했으니 가만히 실행했다. 그리고 막바지 진땀 날 때 열어본 세 번째 봉투에는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어서 도망가라”
고을 주(州)자를 이름으로 달고 있는 도시는 대개 강을 끼고 있다. 들여다보면 한자 주(州)는 내 천(川)자 사이에 세 개의 점이 찍힌 형상이다. 천(川)자는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이고 그 줄 사이에 찍힌 점은 흐르는 물 가생이에 이룩된 땅을 이르는 것이라. 처음 사람들이 뿌리내리고 살 맞춤한 취락 조건으로 물가를 꼽았을 터 오래된 도시 이름이 주(州)자를 얻은 연유일 것이다.진주는 지리산과 덕유산을 수원으로 하는 남강을 복판에 끼고 네 개의 산이 병풍을 두른 분지 안에 옴팍 들어앉아 있다. 맑은 물 넉넉한 강 따라
오월비 맞는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은 오월에 누리는 장관이다. 연이틀 비가 오던 지난주 진양호반에 앉아 본 것은 무심히 섰던 예전의 그 식물이 아니었다. 나무는 그 부드러운 세우를 온몸으로 소중히 받아 적시며 마치 열락에 빠진 듯 떨며 서 있다. 연둣빛은 한층 짙어지고 이파리는 더 넓어졌다.시내 중심에 오랫동안 가로수로 심어졌던 플라타너스는 늘어나는 차와 길가 건물의 개 증축에 밀려 그 무성하던 몸피가 버혀지고, 남강 가녘의 수양버들도 새길을 내느라 솎아진지 이미 오래다. 이제 가로수는 은행나무 벚나무가 대종이 됐다. 그러구러
평양 공연단이 꾸려지고 발표된 참여 가수들의 면면을 훑어보건대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조용필 최진희 이선희는 물론이고 특히 친애하는 ‘강산에’에다 ‘윤밴’에 백지영도 들어갔고 ‘불후의 명곡’에서 놀라운 가창력을 보여주던 알리, 정인 등 낯익은 얼굴들이 뽑혔다. 다만 생소한 이름의 걸 그룹’ 하나이 유난히 화제라. ‘레드벨벳’에다 ‘빨간 맛’이란다. 이슥해지며 작정하길 기왕 늙더라도 새것은 허투루 여기고 주야장천 ‘온고지신’을 읊어대는 ‘꼰대’ 되기는 더디 하자 했음에도 ‘빨간’과 ‘레드’중 어느 것이 가수 이름이고 어느 것이 노래 제
대북특별사절단이 들고 온 방북 결과가 담긴 보따리를 펼치니 예상을 뛰어넘는 눈부신 소출이 담겼다. 하나하나가 엊그제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파격적 내용이다. 내보기에 그중 두 가지는 특히 놀랍다.1.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2. 북측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 또한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천명한 두 가지 사안은 전쟁 발발 개연성의 싹을 자르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에게 이것 이상의 절박한
호주‘페더러‘는 역시 강했다. 뉘라도 손쓸 엄두를 못 낼 예각에 떨어지는 ’서버‘는 서릿발같이 준엄했다. 반 박자 빠른 스트로크와 구석을 향해 빨랫줄마냥 일직선으로 내지르는 백핸드는 황제의 칭호에 걸맞은 손속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정현‘은 ’딱 거기까지‘만이었지만 혜성같이 나타난 그가 우리에게 준 인상과 감동은 결코 페더러의 그것에 못잖았다. 팔다리 길이나 섭생의 근본이 다른지라 땡볕에 단둘이 마주 서서 짧게는 2시간 길면 4시간을 넘겨서까지 라켓을 휘둘러야 하는 이 대결은 동양인이 서양을 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한계 종목이었다
경찰과 기자, 교사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밥값은 누가 냈을까?시쳇말로 ‘아재 개그’ 티가 나는 이 퀴즈는 나름 반전의 순간이 기름지다. 하지만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씁쓸함을 담고 있는 물음이다. 그 우스개의 이면에는 공동체를 건사해 나가는 주요기관인 치안과 언론과 교육의 종사자를 바라보는 소시민의 시선이 들어있다. 만연해 있지만 대놓고 떠들기 애매한 이야기는 그렇게 은유의 타래를 감다가 잘 깎인 수수께끼로 태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 퀴즈는 지금 세태에는 볼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밥값은
2017년 12월 10일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진주성 앞에 세워졌던 형평탑을 이곳 칠암동 남강가로 옮기게 되었기에 그 연유와 연원을 천지신명과 선현께 삼가 고하나이다.1923년 차별과 억압에 신음하던 천민 백정과 시민의식에 눈뜬 진주의 지식인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차별 없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이 외침은 형평운동으로 불리며 삽시간에 전국으로 메아리쳐 번졌습니다.진주라는 토양이 배태하고 기른 이 초유의 인권운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 사람들은 형평사 창립 70주년을 한